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전면전 기로에 서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의 판도가 요동치고 있다. 미국과 이란 사이의 직접적인 충돌 가능성이 가시화되자 자산시장의 자금 흐름은 안전자산과 인플레이션 헤지(위험 분산) 수단인 원자재로 급격히 쏠리는 모습이다. 특히 국제유가가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리면서 에너지 관련 투자 상품이 새로운 투자처로 급부상하고 있다.
31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원유 상장지수펀드(ETF)와 상장지수증권(ETN) 가격은 4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 중이다. 대표 원유 ETF인 ‘KODEX WTI원유선물(H)’의 수익률은 한 달 사이 58% 넘게 급등했다. 이는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위협으로 서부텍사스산원유(WTI)가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하고, 브렌트유가 115달러선을 터치하는 등 국제 유가가 가파르게 치솟은 영향이 직접적으로 반영된 결과다.
유가 폭등이 촉발한 인플레이션 공포는 국내 증시와 외환시장을 집어삼켰다. 이날 코스피는 전 거래일보다 4.26% 급락하며 5000선으로 밀려났다. 특히 시가총액 1, 2위 반도체주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각각 5.16%, 7.56% 하락해 지수 하방 압력을 높였다.
외환시장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원·달러 환율은 1530원을 넘어 1540원을 향해 치솟았다. 장중 한때 1536.5원까지 올라 금융위기 때인 2009년 3월 10일 1561원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최종 14.4원 오른 1530.1원으로, 종가 기준 4거래일 연속 1500원대 마감했다. 안전자산인 달러로 자금이 몰리는 ‘달러 엑소더스’ 현상이 심화되면서 원화 가치는 연일 바닥을 치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현재 상황을 증시와 채권이 역대급 수익률 저하를 겪었던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와 비교하고 있다. 당시 글로벌 금융시장은 전쟁 여파로 전통적인 자산 배분 전략이 무너졌지만, 원자재만은 홀로 수익을 내며 자산 방어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최진영 대신증권 연구원은 “호르무즈 해협의 지정학적 불안은 단순한 심리적 요인을 넘어 실질적인 공급망 훼손으로 이어지고 있다”며 “과거 에너지 쇼크 사례를 비춰 볼 때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선에 안착하는 ‘뉴노멀’ 구간에 진입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김대준 한국투자증권 연구원 역시 “현재 시장은 주식과 채권이 동반 하락했던 2022년의 양상을 띠고 있다”며 “전통 자산의 매력이 급격히 떨어진 시점에서 원자재 ETF는 포트폴리오를 방어할 수 있는 유효한 대안”이라고 제언했다.
하지만 ‘공포에 기반한 랠리’의 위험성도 동시에 경고하고 있다. 지정학적 이슈는 정치적 타결이나 전황의 변화에 따라 단기간에 급락할 위험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가는 하루 만에 100달러선이 무너졌다가 다시 반등하는 등 극심한 널뛰기 장세를 연출하고 있다.
금융당국 또한 한국거래소를 통해 원유 레버리지 상품 등에 대한 ‘투자유의’ 등급을 상향 조정하며, 개인 투자자들의 과도한 추격 매수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금융당국은 “원자재 상품은 변동성이 큰 하이 리스크 상품인 만큼, 과거 사례를 맹신해 과도한 레버리지 투자를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며 분산 투자 접근을 당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