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탄핵과 MZ세대] 국회 앞 집회 가보니… ‘메시지’만큼이나 ‘메신저’ 눈길

-아이돌 응원봉 이어 스포츠·게임 관련 아이템도 등장
-캐럴·K팝·트로트 속 가두행진… “즐겨야 안 지친다”

BTS와 러블리즈 응원봉을 들고 집회 행사에 참여 중인 고등학생들. 박재림 기자

 

 “우리 땐 화염병을 들었는데 요즘 친구들은 응원봉을 들었네요.”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일대에서 열린 ‘탄핵 집회’에 나선 중년의 참가자가 색색의 응원봉이 만들어낸 빛의 물결을 보며 전한 말이다. 1980년대 후반 대학생 시절 수많은 시위에 나섰다는 그는 과거의 전쟁 같았던 시위보다는 한바탕 축제 같은 지금의 집회가 훨씬 보기 좋고 효과도 커 보인다며 엄지를 세웠다.

 

 윤석열정권퇴진운동본부가 주최한 이날 집회는 오후 6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국회의사당이 정면으로 보이는 서울지하철 9호선 국회의사당역 5번 출구 인근 대로로 사람들이 집결했다. 이날 모인 인원은 주최 측 추산 4만 명, 경찰 비공식 추산 6000명. 그중 10~30대로 보이는 젊은이들의 비중이 상당히 높아 보였다.

 

 지난주 비상계엄 사태와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등에 따른 집회 때 화제가 된 아이돌 콘서트 응원봉이 이날도 곳곳에서 알록달록 빛났다. 글로벌 K팝 스타 BTS의 응원봉을 든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은 “사실 BTS ‘덕질’은 끝냈지만 집회 아이템으로 유명하다고 해서 옛 추억을 떠올리며 챙겨 나왔다”고 말했다. 레드벨벳의 응원봉을 흔든 또 다른 고등학생은 “혹시 몰라서 예비용 건전지도 가져왔다”고 말하며 웃었다.

 

집회 현장에서 보인 프로야구팀 응원봉들. 박재림 기자

 

 아이돌 응원봉이 아니더라도 빛을 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참가자들의 손에 쥐어있었다. 전통적인 종이컵에 끼운 촛불, 촛불 모양의 LED 조명, 경광봉, 플래시를 켠 휴대전화, 별∙하트∙달 모양 같은 갖가지 형태의 조명봉이 눈에 띄었다. 프로야구팀의 응원봉에 조명봉을 결합한 것도 보였다. 집회 현장 곳곳에서 상인들이 조명봉을 좌판에 진열해 팔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탄핵’이라는 문구가 적힌 ‘맞춤형’도 있었다.

 

 행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참여자 연설, 노래 합창, 구호 외치기 등이 진행됐다. 참가자들은 미리 준비한 자리를 깔고 앉아 응원봉을 흔들거나 주최 측이 나눠준 ‘내란수괴 윤석열 즉각 탄핵’, ‘내란동조 국민의힘 해체하라’라고 적힌 피켓 혹은 각자 준비한 손팻말을 들었다. 한 손에 김밥, 빵, 떡 등을 들고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는 중에도 나머지 손은 행사에 쓰는 모습이었다.

 

집회 참가자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박재림 기자

 

 참가자들의 메시지 내용도, 전달하는 방법도 가지각색이었다. 취업 준비생은 태블릿PC에 ‘면접 보고 달려왔습니다. 취업도 힘든데 석열이가 속 썩히네 탄핵 당해라 넌’이라는 내용을 띄웠고, 대학원생은 스케치북에 ‘더는 미룰 수 없다 나의 논문 너의 탄핵’을 써왔다. 생일을 맞이한 학생은 ‘오늘 생일 생일선물 탄핵’이라고 쓴 스케치북을 펼쳤다.

 

 30대 회사원은 유명게임 리그오브레전드(L.O.L)의 ‘소환사의 협곡’ 아이콘 이미지와 더불어 ‘탄핵의 협곡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메시지를 새긴 현수막을 몸에 둘렀다. 그는 “게임에 미친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보수 진영에서 저의 배후를 묻는다면 L.O.L 세계 챔피언 프로게이머 ‘페이커’라고 답하겠다”고 말했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국민의힘 중앙당사까지 가두행진을 시작하는 참가자들. 박재림 기자

 

 이날 오후 7시50분쯤부터 가두행진이 시작됐다. 참가자들은 국민의힘 중앙당사까지 약 1㎞를 걸었다. 구호와 더불어 노래를 합창했다. ‘다시 만난 세계’, ‘아파트’, ‘위플래시’ 같은 K팝은 물론 트로트 ‘아모르파티’에 캐럴 ‘펠리스 나비다’도 흘러나왔다. 가사는 대부분 집회의 성격에 맞게 바뀌었는데 ‘펠리스 나비다’는 ‘탄핵이 다비다(답이다)’가 되는 식이다. 함께 부를 노래 제목과 구호를 리드미컬하게 외치는 주최 측 관계자와 이에 반응하는 참가자들의 모습은 얼핏 클럽의 DJ와 손님들처럼 보일 정도로 흥이 넘쳤다.

 

 행진 중 민주노총 등 다양한 단체의 깃발 사이로 독특한 명칭이 새겨진 깃발들이 휘날렸다. ‘응원봉을 든 오타쿠 시민연대’, ‘제발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사람들의 모임’, ‘전국 엄마가 싫어하는 패션 연합’, ‘해충 잡는 사람들’이 그랬다. 한 참가자는 “지난 주말에는 재미있는 깃발이 정말 많았다”며 ‘민주묘총’, ‘강아지발냄새연구회’, ‘전국거북목협회’, ‘전국수족냉증연합’ 등을 소개했다.

 

집회에서 이목을 집중시킨 독특한 단체명이 적힌 깃발들. 박재림 기자.

 

 가두행렬이 가게 앞을 지나자 밖으로 나와 박수를 친 상인은 “장사 때문에 함께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라도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약 20분간 이어진 행진은 국민의힘 당사 앞에서 끝났다. 참가자들은 약 1시간 동안 당사를 향해 “해체해”라는 구호를 연호하고 노래를 합창했다.

 

 당사 앞에서 프로축구팀 유니폼을 착용한 30대 남성은 ‘윤석열 탄핵’이라고 적은 레드카드를 꺼내 보였고, 20대 여성은 ‘탄핵하라’라고 쓴 붉은 띠를 머리에 감은 인형으로 항의 메시지를 보냈다. 주최 측이 준비한 스티커형 피켓을 당사 건물 주변에 붙이는 퍼포먼스를 끝으로 약 3시간에 걸친 집회가 종료됐다.

 

축구 유니폼을 입은 집회 참가자가 국민의힘 중앙당사 앞에서 레드카드를 들어 보이고 있다. 박재림 기자

 

붉은띠를 머리에 두른 인형. 박재림 기자

 

 이날 집회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외국인들의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네덜란드에서 왔다는 로버트 반 더 베일(Robert Van der bijl)은 “우리나라의 공격적이고 충돌이 많은 시위와는 완전히 달랐다. 마치 축제 같았다”고 감탄했다. 미국 출신의 토마스 그레고리(Thomas Gregory)는 “피스풀(Peaceful)”, “서프라이즈(Surprise)” 연호하며 평화적인 집회에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고등학생이던 2000년대 후반부터 시위와 집회에 자주 나섰다는 30대 참석자는 “2016~2017년 대통령 탄핵 집회부터 민주묘총 같은 독특한 깃발들이 등장하면서 화제가 됐다. 이젠 본인의 개성을 살린 아이템을 한 가지 이상 지니는 게 트렌드가 된 것 같다”며 “시위나 집회는 지속성이 중요한데 너무 진지하기만 하면 오래 버티기 어렵다. 스스로가 재미있고 즐거워야 한다. 그런 면에서 요즘 Z세대가 정말 대견하다”고 말하며 흐뭇해했다.

 

 밤 10시쯤 국회의사당 일대는 언제 수많은 인파가 모였냐는 듯 허전하고 조용했다. 사람들이 자리를 깔고 앉아있다 행진을 한 곳에서 차량 몇 대가 간헐적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대목’이라며 평일이지만 장사를 했다는 이동식 포장마차 상인은 내일을 기약했다. 집회에 참여한 어린 학생들에게 컵라면을 먹이려 간이 식당을 연 중년 남성도 테이블을 접었다. 손님이 너무 많아서 정신없었다는 국회의사당역 내부 편의점 점주 역시 셔터를 내리고 내부 정리 중이었다.

 

집회 장소 인근 도보에 놓인 쓰레기봉투. 박재림 기자

 

 지하철역 출구 근처 도보 한쪽에 모인 쓰레기가 담긴 대형 봉투 중 하나에는 ‘여기 봉투에 쓰레기 예쁘게 잘 버려주세요. 우리는 쓰레기 청소로 묵묵히 연대합니다. 여성촛불청소연합’이란 메시지가 붙어있었다.

 

박재림 기자 jami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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